박천욱
2022-08-05
출처: YES24

[ 글을 시작하기 전에 ]

춤추는 곰 모양 젤리 하리보를 간식으로 즐기던 독일은 폭스바겐 자동차를 개조해 만든 장갑차에 올라타 전쟁을 일으켰고, 전쟁에 겁먹은 아이들을 위해 덴마크의 부모들은 레고를 선물로 사줬다.

3M 스카치 셀로판테이프로 탄약 박스를 포장하던 미군은 전투 식량으로 스팸을 먹었으며,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승리에는 수백만 개의 페니실린이 크게 기여했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브랜드가 피고 졌다. 이 중에는 역사를 이끌어간 브랜드도, 일상의 방향을 바꾸어놓은 브랜드도 있었다. 

역사의 판도를 바꾼 최초의 브랜드, 또는 끈질기게 살아남은 브랜드들의 전설적인 제품들은 존재 자체가 업계를 대표하기도 한다. 

하나의 제품명이 모든 제품을 대표하는 이름이 되고 브랜드가 되는 흐름을 보면서 어떤 역사적인 일들이나 사건이 있었는지 알아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그럼 대표적으로 무슨 브랜드들이 있는지 알아보자. 


Ⅰ. 타바스코 1868년

1800년대 중반 미국 루이지애나 주에서 살던 에드먼드 매킬러니는 농장을 운영하던 마리 엘리자 에이버리와 결혼하고 자녀도 낳으며 평범하게 가정을 꾸려나갔다. 

하지만 1861년 4월 미국 남북 전쟁은 그의 삶을 바꾸어 놓았고 에드먼드는 전쟁 후 황폐해진 농장을 재건해야 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로 타바스코 고추 씨앗을 얻어 재배하게 되고 매운맛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되었다. 

타바스코를 만드는 방법은 적절히 익은 타바스코 고추를 잘 빻은 뒤 참나무 통에 넣고 그 위에 에이버리 아일랜드 산 암염을 덮어서 한 달간 숙성시킨다. 

그다음으로 사탕수수로 만든 증류 식초를 섞어 신맛까지 첨가하면 묽은 타바스코 소스가 완성된다. 

이후 맛을 향상하기 위해 3년의 숙성 기간을 거치면 타바스코 소스가 된다. 

에드먼드는 이 소스에 아내의 농장 이름을 따 프티 앙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소스의 이름은 이후 멕시코 원주민 언어로 뜨겁고 온화한 토양을 의미하는 타바스코로 바뀌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6년 월터는 타바스코 소스가 담긴 소포 상자를 마치 군인들의 가족이 보낸 것처럼 꾸며 전쟁터로 보냈다. 

월터는 군인들의 심정을 잘 알았기에 이 소포 상자가 고향에 대한 향수를 자극할 것이라 생각했다.

소포 상자 속에는 타바스코 소스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투 식량과 타바스코 소스, 그리고 소포 안의 재료를 활용해 만들 수 있는 레시피도 들어 있었다. 

맛있는 음식이 병사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기에 생각해낼 수 있는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월터의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이후 미국의 전투식량에는 타바스코 소스가 빠지지 않았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생각한 작은 배려와 경험에서 우러난 번뜩이는 마케팅이 타바스코를 공식적인 전투 식량으로 만든 셈이다. 


 Ⅱ. 하리보 1920년

닉네임에는 정체성이 반영되어야지

1893년 독일 본의 한 마을 프리스 도르프에서 한스 리겔이라는 아이가 태어났다. 

건축가였던 아버지 피터 리겔은 한스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건축 도면을 그리는 법부터 가르쳤다. 

아들이 자신과 같은 건축가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한스는 그 무렵 본의 남동쪽 고데스 베르크에 위치한 클로우트겐 운트 마이어 감초 사탕 공장에서 사탕 만드는 법도 동시에 배우며 일했는데, 이곳에서 5년의 수습 과정을 마친 뒤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제과 길을 걷기로 결정한다. 

한스는 오버하우젠에 위치한 제과 공장에서 잠시 일하다가 본 케세니히에 있는 하이넨이라는 제과공장으로 이직했다. 

이곳에서 몇 개월간 캔디 메이커로 일하다가 하이넨에 투자하여 비즈니스 파트너가 되기에 이르렀다. 

하이넨 제과공장의 이름은 하이넨 운트 리겔로 변경됐다. 그러나 한스가 궁극적으로 원한 것은 자신만의 제과 공장이었다.

이에 1920년 12월 한스는 본 케세니히에 집을 매입했다. 

그리고 뒷 마당에 딸린 작은 세탁실에 자신만의 사탕을 생산하기 위한 회사를 설립했다. 회사라고 했지만 설탕 한 자루, 석판, 의자, 화덕, 구리 솥, 롤러를 하나씩 구비한 아주 작은 작업실에서 사탕을 만들 시 시작한 것이다. 

회사 이름은 자기 이름인 한스 리겔과 도시 이름 본에서 철자를 따와 하리보라고 지었다.

하리보라는 이름 속에는 창립자의 이름과 창립 지역이 숨어 있는 것이다. 

1921년 한스는 세르트루드 비안덴이라는 여성과 결혼했다. 결혼 후 아내 게르트루드는 하리보의 첫 직원으로 함께 일했다. 

한스가 달콤한 사탕을 만들면 게르트루드는 자전거를 타고 마을로 나가 사탕을 판매했다. 하지만 둘의 노력에도 사탕은 기대만큼 잘 팔리지 않았다. 

판매량을 높이기 위해 고심하던 한스는 1800년대 독일 축제에서 인기를 끈, 춤추는 곰을 떠올렸다. 이에 1922년 탄즈베렌이란 이름의 새로운 사탕을 만들었다. 

우리말로 춤추는 곰이라는 뜻이다. 

젤라틴을 베이스로 한 곰 모양의 사탕은 그야말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수많은 아이들이 탄즈베렌과 사랑에 빠졌다.


Ⅲ. 스팸 1927년

고깃집이 블루오션?

미국 시카고 한 도살장에서 일하던 조지 호멜은 1891년 미네소타주 오스틴에 육류 포장 업체, 조지 호멜 컴퍼니를 설립했다.

육류 포장 판매업이 블루오션이던 1890년 초 작은 고깃덩어리 하나도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조지의 깐깐한 성격 덕에 조지 호멜 컴퍼니는 점차 고급 육가공업체로 성장해 나갔다. 

조지에게는 제이 호멜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조지는 제이에게 사업을 가르쳐주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 생산라인에서부터 직접 일하며 스스로 노하우를 터득하라고 말했다. 

이에 제이는 1914년부터 2년간 아버지 회사의 여러 부서를 옮겨 다니며 육가공의 모든 것을 배우고 나서야 조지 호멜 컴퍼니의 부사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1927년 조지 호멜이 67세의 나이로 은퇴하면서 아들 제이 호멜이 회장 자리를 이어받았다. 

조지와 제이는 둘 다 리더십이 있었지만 그 결이 조금 달랐다.

조지가 제품의 품질과 공장 효율성에 집중하는 실용적인 리더라면 제이는 제품은 물론 유통 방법, 판매 기법, 마케팅 전략까지 새로움을 추구하는 아이디어맨이었다. 

당시 육류는 푸줏간에서 한 번 더 조리해야만 먹을 수 있었는데, 제이는 이렇게 번거로운 과정 없이 소비자가 구매한 뒤 곧바로 먹을 수 있는 육류 식품을 만들고 싶어 했다. 

이에 회사 내 연구 개발팀과 함께 수년간 개발에 힘썼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는 얻지 못했다. 

그러다 유럽 여행 중 지인으로부터 독일 함부르크에서 작은 육가공 공장을 운영하던 폴 존을 소개받았다. 

당시 폴은 캔 속에 햄을 담아 포장하는 방법을 개발한 상태였다. 제이는 폴에게 도움을 청했고 폴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왔다. 

1927년 2월 둘은 세계 최초로 통조림 햄 제품을 공식적으로 출시했다. 

1939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이 폴란드의 서쪽 국경을 침공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이다.

미국은 전쟁 초기에 동맹국인 영국에 무기와 탄약, 식량 등 어마어마한 양의 보급품을 원조했다. 

이때 호멜 컴퍼니는 일주일에 최대 1,500만 톤의 고기를 수출했고, 그중 대부분이 스팸이었다. 

당시 영국은 수송로가 봉쇄당해 배급제를 시행할 만큼 물자 공급이 어려웠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 놓인 영국에게 스팸은 단비 같은 식료품이었다. 쉽게 상해서 버려질 위험이 있는 다른 고기들과 달리 통조림 햄이라 보관이 쉽고 조리도 간편했다. 

무엇보다도 고열량 단백질인 육류였다. 가공도 어렵지 않아 대량생산으로 끊임없는 공급이 가능했던 만큼 여러모로 완벽한 전투 식량이 셈이었다. 

이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스팸 랜드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스팸을 소비했다. 

처음에는 간편하고 맛 좋은 전투 식량으로 평가됐지만, 삼시 세끼 스팸만 먹다 보니 많은 사람이 이 간편식에 질렸다. 

1970년 영국 BBC 코미디 풍자극인 몬티 파이튼에서도 스팸을 주제로 다뤘다. 식사하러 온 손님에게 종업원이 메뉴를 불러준다. 그런데 모든 메뉴에 스팸이 포함되어 있었다. 

스팸이 들어가지 않은 메뉴는 없나요? 스팸에 계란 소시지를 더한 스팸에는 스팸이 덜 들어가는데 그거라도 드릴까요?

손님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든 메뉴에 스팸이 제공되는 이 콩트에는 스팸에 완전히 질려 벼린 영국인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방송 이후 스팸에는 과잉 공급이라는 이미지가 붙었고, 오늘날 상업적이고 불필요한 광고성 이메일을 스팸 메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Ⅳ. 환타 1940년

코카콜라는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이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면서 수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여러 나라에 세워진 코카콜라 지사 중 특히 독일 지사는 1929년 부임한 미국 태생의 레이 리빙톤 파워스의 뛰어난 사업 능력 덕분에 승승장구했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으면서 나치의 세상이 열려 쏙 이 시기 코카콜라 독일 지사에 막스 카이트란 30살의 남성이 입사했다. 

막스는 코카콜라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직원이었다. 독일 지사가 잘되기를 바라서 자신은 가입하지도 않은 나치당의 경례까지 히틀러에게 할 정도였다. 

1938년 코카콜라 독일 지사의 사장이던 레이가 세상을 떠나자 막스는 바로 회사를 인수했다. 

당시 독일에서의 코카콜라 판매량은 400만 병에 이르었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하며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이때부터 코카콜라 유통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미군에게는 5 센트라는 저렴한 가격에 공급된 반면, 적군인 독일에는 공급이 전면 중단된다. 

막스는 고민 끝에 독일 시장에 공급할 새로운 음료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여러 화학자와 함께 전시 배급 내에서 제조 가능한 음료를 개발한 것이다. 

수년간의 전쟁으로 식재료가 부족했기 때문에 치즈나 버터 등을 만들고 남은 액체인 유장, 사과주를 만들고 남은 사과 섬유질, 그 밖에도 과일 부스러기와 사탕무 등 다른 식품을 만들고 남은 음식 찌꺼기들을 모았다. 

찌꺼기 재료들을 섞은 혼합물에 탄산을 가미하니 새로운 음료가 만들어졌다. 제법 달달하고 맛있었다. 

이 새로운 음료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까? 막스는 새로운 이름에 상상력을 발휘한다는 의미의 판타지, 이 단어를 줄여 환타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시 환타는 마시기 위해서만 구입한 것이 아니라 설탕이 떨어졌을 때 요리의 단맛을 내기 위해 조미료 대용으로도 사용되었다.

코카콜라 독일 지사는 전쟁 위기를 극복했고 전쟁 이후에 막스는 코카콜라 유럽 경영을 맡게 된다. 

이후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새로운 레시피의 환타가 부활했다. 나폴리의 감귤을 이용해 만든 판타 오렌지다. 

1960년 미국 코카콜라 본사는 환타를 인수하고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맛의 환타가 만들어지게 된다. 


Ⅴ. 크리넥스 1924년

킴벌리 클라크는 1872년 미국 위스콘신주 니나에서 존 알프레드 킴벌리, 찰스 벤자민 클라크, 하빌라 밥 콕크, 프랭클린 샤턱 이렇게 4명의 동업자가 제지 공장을 세우며 시작되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세상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때문에 붕대, 솜, 거즈 등의 의료용품도 턱없이 부족했다. 

이때 면 소재 대체품으로 셀루코튼이라는 소재를 킴벌리 클라크가 만들어내게 된다.

셀루코튼은 흡수력이 면보다 5배나 높지만 가격은 더 저렴해서 대량생산이 가능했다. 

이 신소재는 일회용이라 면보다 위생 면에서 우수했고 편리해 전쟁터에서 환영을 받았다. 

당시 여성들은 화장 지우기에 손수건을 사용했는데, 킴벌리 클라크는 빨아 써야 하는 손수건을 대체할 만한 일회용 손수건이 존재한다면 분명 잘 팔리리라 생각했다. 

이에 셀루코튼을 종잇장처럼 아주 얇게 만든 제품이 개발되었다. 제품의 이름을 고민하던 킴벌리 클라크는 최초의 민간 제품인 코텍스의 K와 EX에 더해 닦는다는 뜻의 클렌징에서 LEAN을 가져온 뒤, A를 E로 바꾼 단어를 만들었다. 

그렇게 1924년 크리넥스 일회용 손수건이 출시됐다. 

초기 타깃이 중산층 여성이었기에 할리우드와 브로드웨이 스타들을 기용해 화장 지우는 광고까지 하며 적극적으로 마케팅했다. 

하지만 크리넥스 일회용 손수건은 생각보다 인기를 얻지 못했다. 손수건을 빨아 쓰는 것에 익숙했던 여성들이 일회용 손수건을 낯설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코를 풀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더 용이하다는 사용 후기로 인해 제품을 좀 더 편리하게 만들기 위한 연구를 했다. 

연구 끝에 1928년 한 장씩 뽑아 쓰는 크리넥스 티슈 상자를 출시했다. 


Ⅵ. 모노폴리 1933년

독점 규제를 가르치기 위해 태어난 독점 게임

제임스는 1882년 일리노이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평범한 이야기를 출간하며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특히 백만장자의 악랄함과 무지함에 대해 비판했으며, 이러한 제임스의 가치관은 자연스럽게 딸 엘리자베스 매기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1%의 인구가 99%의 토지를 쥐고 있기 때문에 1%가 소유한 토지에 대한 지가 상승분을 세금으로 매기면 국가의 운영은 물론 99%에게 복지를 제공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는 헨리의 단일 토지세 이론을 가까운 지인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렇게 만든 게임이 모노폴리로 주사위를 굴려 말을 이동하고 자본을 활용해 토지를 구입하고 건물을 사는 게임이었다. 상대편이 획득한 토지에 걸리면 임대료를 지불하고 건축물에 따라 차등화된 임대료를 지불해야 한다.

최종적으로 많은 자본을 얻는 플레이어가 승리하는 게임이었다. 


Ⅶ. 롤스로이스 1904년

가난하지만 천재적인 기계공

헨리 로이스는 1863년 3월 27일 영국 알월턴에서 방앗간을 운영하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헨리가 어릴 때 로이스 가족은 런던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는데 9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어린 헨리는 신문을 팔거나 전보를 배달하며 힘들게 돈을 벌어야 했다.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헌 리는 15살까지 학교를 겨우 1년밖에 다니지 못했다. 

찰스 스튜어트 롤스는 1877년 8월 27일 런던 버클리 스퀘어에 살던 랑가톡 남작 1세와 랑가톡 부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쉽게 말해 영국의 대지주 귀족 가문의 자제였다. 런던에서 태어났지만 웨일스에서 자라난 찰스는 버크셔에 있는 예비학교를 졸업한 뒤 영국 최고 명문인 이튼 칼리지에서 엔지니어링을 배웠다. 

롤스와 로이스의 만남

FH 로이스 앤 코의 이사인 헨리 에드먼드는 찰스의 친구이기도 했다. 이날 헨리가 만든 로이스 10을 시승해본 찰스는 깜짝 놀랐다. 자동차 성능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이에 1904년 12월 23일 헨리가 만든 자동차에 롤스의 R와 로이스의 R을 겹쳐서 만든 롤스로이스 배지가 붙었다. 

이후 파트너십으로만 함께하던 두 사람은 점차 자동차 제조업의 사업성을 깨닫고, 1906년 두 사람의 이름을 딴 롤스로이스 리미티드라는 회사를 설립한다. 

그다음 맨체스터에 공장을 지으며 적극적으로 자동차 사업에 뛰어들었다. 독일에서 벤츠가 미국에서 포드가 개발됐다면 영국에서는 롤스로이스가 등장한 셈이다. 

세계 최고의 차, 실버 고스트

헨리는 롤스로이스 30hp보다 출력이 더 좋은 모델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고 롤스로이스 40/50hp를 처음 공개한다. 

외관은 은빛 알루미늄 페인트가 칠해져 이 차는 밤에 소리 없이 부드럽게 달려 모습이 마치 은빛 유령처럼 보인다고 하여 실버 고스트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편 영국 왕실 자동차 클럽은 내구성을 시험하는 경주를 개최했고, 이 경주에서 실버 고스트는 하루 12시간씩 5주 동안 무려 2만 4,135km를 고장 없이 달리는 기록을 세웠다. 

이를 계기로 영국 왕실에서는 실버 고스트를 왕실 전용차로 선택했다. 롤스로이스는 지금까지도 영국 왕실의 의전차량으로 사용된다. 


 [ 글을 마치며 ]

스팸메일이 정말로 스팸 통조림에서 유래가 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로웠다. 

나아가 롤스로이스가 왜 유명한지와 고가 차량의 대명사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그동안 잘 알지 못했는데 이제는 조금 이해를 하게 되었다. 

헨리 로이스와 찰스 스튜어트 롤스라는 두 사람이 만나서 합심해서 세운 회사라는 점, 이 때문에 롤스 로이스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다. 

그리고 영국 황실에 납품하는 제품에는 로열 워런트라는 왕실 인증 허가 브랜드가 되는데 롤스 로이스는 차량 부분에서 이 허가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벤틀리나 재규어, 랜드로버도 로열 워런트를 가지고 있지만 롤스 로이스가 이 브랜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사용하는 브랜드들을 보면 아주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와서 마치 우리 생활에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제품으로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를 모를 정도로 까마득한 제품이 많다.

칠성 사이다나, 가스 활명수, 바셀린, 존슨 앤 존슨 오일, 스팸, 크리넥스 수없이 많은데 결국 이런 제품들도 누군가에 의해서 탄생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오리지널을 만들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제품이 만들어진 다음에 인기를 얻어 사람들에게 널리 사용되는 것 또한 역사적인 사건이 뒷받침이 되어야 할 만큼 운명적인 만남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오늘 이 시간에도 새로운 브랜드는 탄생되고 있고 새로운 제품이 시장에서 소비자들의 마음을 붙잡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오리지널의 탄생이 이어질 수 있다. 그런 오리지널의 탄생은 결국 사람들에게 품질로서 사용성으로 인정받는 것이 핵심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참고 도서 : 오리지널의 탄생

박천욱
에디터
1만권 독서하고 전세계를 여행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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